제1부 · 07 · 초고

서찰과 명단

전장을 떠난 명령이 산문과 대청에 닿았다.

마른 강바닥에서 물러난 관군은 밤새 걸어 낮은 성채로 들어갔다. 불을 피울 장작보다 부상자를 눕힐 자리가 먼저 모자랐다. 대장은 갑옷을 벗지 않은 채 지도 앞에 섰다. 패주하며 남겨 둔 척후가 돌아와 반란군 본진의 연기와 군량 수레가 모인 계곡을 확인했다.

“본진은 찾았습니다.” 부장이 말했다. “지금 병력으로 다시 들어가면 같은 일이 벌어집니다.”

대장은 젖은 손으로 지도를 눌렀다. “그럼 물러선다. 황실에 지원군을 청해.”

급보가 도성에 닿은 날, 황태자 주표(朱標)는 장계를 두 벌로 나누었다. 하나는 전사자와 패전 원인을 빠짐없이 적어 어전에 올리고, 다른 하나는 남쪽 고을에서 피란민이 굶고 있다는 보고만 추려 황후의 처소로 보냈다. 피란민의 고통도 거짓은 아니었다. 다만 강호인 추가 파견을 둘러싼 대신들의 거래는 그 종이에 없었다.

밤이 깊자 황태자는 병부상서(兵部尚書)와 호부상서(戶部尚書)를 동궁으로 불렀다. “화산은 산 아래 농토를, 곤륜은 산길의 권리를 바란다. 형산과 사천은 다른 세가보다 이름이 뒤처지는 걸 싫어하지.” 황태자는 손가락으로 봉하지 않은 명단을 두드렸다. “그들이 바라는 것을 주겠다고 하라. 대신 누가 어느 땅을 받는지는 내가 먼저 보겠다.”

병부상서가 물었다. “폐하께서 다시 강호에 손을 벌리시겠습니까? 개국의 전장에서 제자들을 잃은 문파들입니다.”

“어마마마께서 피란민의 사정을 먼저 말씀드릴 거다.” 주표는 대답했다. “아바마마는 그분의 말을 외면하지 않으신다.” 그의 말이 끝나자 두 대신은 서로를 보았다. 하나는 군량의 장부를, 다른 하나는 하사할 토지의 경계를 떠올렸다. 황태자는 그들이 무슨 계산을 하는지 알고도 묻지 않았다.

병부상서가 물러가려 하자 주표가 그를 다시 불렀다. “이번 토벌 뒤 어느 군영이 누구의 말을 듣는지 내게 먼저 올리시오. 아바마마는 천하를 세우셨다. 나는 그것을 이어 받을 때 어떤 장수가 땅보다 사람을 따르는지 알아야 하오.” 상서는 얼굴을 들지 않았다. “황제께서 아직 계십니다.” “그래서 지금 배워야지.” 황태자는 낮게 답했다. 그는 스스로 긴 세월을 내다본다고 생각했다.

상서가 나간 뒤 황태자는 동궁 문밖에 놓인 또 다른 서류를 발견했다. 종이에는 자신이 조금 전 말한 파견 순서가 미리 적혀 있었다. 붉은 먹으로 고친 부분까지 자신이 서찰에 쓰려던 표현과 같았다. 그는 서리를 불러 “누가 가져왔느냐”고 물었다. 서리는 호부에서 돌린 초안일 것이라 했지만 봉인의 실은 호부의 색이 아니었다. 주표는 종이를 불태우지 않았다. 누가 자신을 앞질렀는지 알아내겠다는 마음으로 소매에 넣었다.

이튿날 황태자는 황제에게 올릴 보고를 직접 고쳐 썼다. 먼저 피란민의 길을 열고, 그다음 군량을 움직이고, 문파의 보상은 전사자 명부를 확인한 뒤 정하게 했다. 자기 뜻을 넣었다는 만족이 들었다. 그러나 보고가 궁문을 지날 때 이미 누군가 그와 같은 순서로 창고의 문을 열고 있었다. 황태자는 그 사실을 아직 몰랐다.

마황후(馬皇后)는 다음 날 황제 주원장을 찾았다. “강을 건너지 못한 사람들이 아이를 업고 산으로 들어갔다 합니다. 군사가 다시 밀리면 그들은 어디로 가겠습니까.” 황후는 숨겨진 거래를 알지 못했다. 피란민의 이름이 적힌 종이를 황제 앞에 펼친 손에는 꾸밈이 없었다.

주원장은 가난한 농가에서 자라 굶주림과 가족의 죽음을 겪고 절에 몸을 의탁했던 시절을 기억했다. 뒤에 반원 봉기의 군대에 들어가 장수와 병졸의 힘으로 명을 세웠고, 전란 속에서 뜻을 함께한 강호인들의 도움도 받았다. 그중 돌아오지 못한 이들이 있었다. 그러나 오래전부터 서로 다른 무리를 은밀히 떠밀어 온 검은 손이 자신의 건국에도 닿았다는 사실은 알지 못했다.

어전회의에서 황제는 전사자 명부를 들어 보였다. “이 이름들을 보라. 개국 때도 강호의 제자들이 죽었다. 또 그들을 보내면 누가 돌아오지 못하겠느냐.”

주표가 한 걸음 나섰다. “아바마마, 병사들만 다시 몰아넣을 수는 없습니다. 길을 열 고수를 먼저 보내고, 피란민이 빠질 틈을 만들게 하십시오. 공을 세운 자에게만 상을 내리면 됩니다.”

호부상서가 기다렸다는 듯 머리를 숙였다. “금전과 토지를 약속하면 문파도 세가도 따를 것입니다. 그들 또한 힘을 키우고 싶을 테니까요.”

“네놈들이 그 마음을 참 잘 아는구나.” 황제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호부상서의 어깨가 굳었다. 주표는 그 앞을 가로막지 않고, 피란민의 명부를 전사자 명부 옆에 놓았다.

긴 침묵 끝에 주원장이 말했다. “고수의 파견을 청하라. 먼저 민간인이 빠져나갈 길을 확보하게 하고, 상으로 내릴 땅과 돈은 따로 장부를 만들어 내게 올려라. 백성의 군량에 손대는 자는 황태자의 사람이든 누구의 사람이든 용서하지 않겠다.”

대신들이 일제히 머리를 조아렸다. 주표도 숙였다. 그러나 내려다보는 그의 눈은 이미 어느 문파에 어떤 땅을 쥐여 주면 다음 싸움에서 누구의 명령을 먼저 들을지 헤아리고 있었다. 네 문파를 포함한 여러 문파와 세가에 금전과 토지의 혜택을 약속하는 서찰이 내려갔다. 문파와 세가는 전장에 보낼 고수를 골라 명단을 올려야 했다.

화산파 장문 적운검 위청악은 봉한 서찰을 읽고 미소를 감추지 않았다. “이번에 공을 세우면 우리 이름이 모든 무림의 앞에 서겠구나.”

장로 고송검 유청림이 맞섰다. “제자 셋이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남은 아이들을 명예 때문에 또 보내시렵니까?”

“명예가 아니다. 나라가 토지를 내놓겠다 하지 않느냐. 산문 아래 농토를 얻게 되면 후대의 제자를 먹일 수 있다.”

유청림은 더 말하지 않았다. 위청악이 손으로 고른 장로 적송검 나운백(羅雲伯)과 고송검 유청림, 제자들의 이름은 그날 저녁부터 훈련장에 불려 나왔다. 제자들은 길을 떠나는 까닭이 백성을 지키기 위해서인지, 새 땅을 얻기 위해서인지 서로 묻지 않았다.

무당파 장문 청허진인 장도원(張道元)은 서찰을 탁자 끝으로 밀었다. “사람을 살리러 갈 장로와 제자를 보내겠소. 그들을 공을 다투는 선봉으로 쓰지는 못하게 하겠소.”

맞은편의 철심도인 오경문이 말했다. “사람을 살리려면 힘이 있어야지요. 이번 기회를 다른 문파에 내주면 훗날 그들의 명령을 받게 됩니다.” 오경문은 이미 내관에게 보낼 별도의 명단을 품속에 넣어 두었다. 장도원이 부상자를 돌볼 사람을 고르는 동안, 오경문은 가장 강한 검수의 이름을 앞줄에 적었다.

형산세가 가주 평산권 형무진(邢武鎭)은 땅을 약속한 서찰을 접었다. “남의 마을을 지켜 주겠다며 내 식구를 전장으로 보내는구나. 누가 돌아오지 못하면 그 땅을 어디에 쓰겠느냐.”

원로 정암장 형수백이 조용히 답했다. “거절하면 황실은 우리를 반란군의 편으로 기억할 겁니다. 이웃 세가는 벌써 세 사람을 올렸습니다.”

형무진은 한참 명단을 바라보다 직접 출정할 고수들과 상처 입은 사람을 돌볼 의원을 함께 적었다. 사천세가에서는 가주 금사수 당효진(唐孝眞)이 백성의 식량을 걱정하는 사이, 장로 독수 당유백이 가주의 붓을 기다리지 않고 사위와 먼 친척을 먼저 명단에 올렸다. 토지의 경계를 두고 그들이 나누던 말은 큰 소리로 읽히지 않았다.

곤륜파 장문 설봉검 마원정도 승전 뒤 산길의 통행권을 셈하며 제자를 뽑았다. 장로 백운수 서담(徐澹)은 지나가는 백성에게 길값을 받을 셈이냐고 물었다. 그는 마원정 대신 전장으로 가서 그 길을 직접 살피겠다고 했다. 청성파 장문 죽영도인 임정현(林正玄)은 구호 인력을 고르려 했고, 장로 음학검 당욱은 내관에게 보낼 검수 명단을 따로 만들었다. 그 어느 대청에서도 황실의 서찰을 태우지는 못했다. 원하는 것을 얻으려는 사람도, 협을 지키려는 사람도 황실이 가진 병력과 명분을 두려워했다. 엇갈린 명단들이 도성으로 향하는 동안, 성채의 대장은 부상자 곁에서 다시 병사를 셌다.

화산의 회의에는 파견 인원 열여덟 명의 이름만 올라왔다. 1대 제자 백소진(白昭眞)은 지난해 산 아래에서 사람을 구하다 허리를 다친 사형 대신 자기 이름을 적어 달라 했다. 위청악은 그가 남아 제자를 가르쳐야 한다며 붓을 놓았다. 장로 나운백은 “장문, 검을 잘 쓰는 자만 보내면 돌아와 제자를 가르칠 사람이 없소”라고 했다. 유청림은 누구를 빼야 할지 쉽게 말하지 못했다. 제자들이 입을 다문 이유는 두려움보다 그 이름을 대신 쓸 누군가가 똑같이 두려울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무당에서는 장문 장도원이 구호 인원에 의원과 길잡이를 먼저 넣었다. 철심도인 오경문은 그 명단을 보고 “앞에서 공을 세운 검수가 없으면 우리 이름은 강호의 뒤에 적힙니다”라고 했다. 1대 제자 문청도(文淸道)가 물었다. “사람을 살리러 가는 길에도 순위가 있습니까?” 오경문은 “네가 살아 돌아오려면 있다”고 답했다. 그 말은 참이면서도 그가 내관과 나눌 땅의 약속을 숨겼다.

청성의 현죽도인 조명원(趙明元)은 자기 제자들을 둘로 나누려 했다. 한쪽은 의원을 지키고 한쪽은 관군의 길을 열게 하자는 생각이었다. 음학검 당욱은 그 편제라면 자신의 검수가 조명원의 명령을 듣게 된다고 반발했다. 임정현은 두 장로 앞에 구호 명단을 놓았다. “같은 산문을 나온 제자가 서로의 전공을 셀 때, 밖의 사람은 우리를 어떻게 보겠나.” 당욱은 머리를 숙였으나 밤에 다른 종이에 자신의 제자들 이름을 다시 썼다.

사천세가의 당효진은 곡식 수레와 약재 수레에 각각 다른 인장을 찍게 했다. 당유백은 독수(毒手)라는 별호가 부끄럽냐며 웃었다. “독도 적을 멈추면 사람을 살립니다.” 당효진은 “우리 의원이 진영에서 얼굴을 가리고 다니게 할 셈이냐”고 물었다. 당유백은 답하지 않았다. 본가에 남을 가주와 현장에서 살아남아야 할 장로는 같은 집안의 이름을 서로 다르게 생각했다.

돌아오는 지원군만으로는 빈자리를 메울 수 없었다. 그는 마을마다 병역을 맡을 사람을 내라는 긴급 징발문에도 도장을 찍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