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란군을 쫓는 군대가 산길을 지나는 동안, 멀리 도성의 한 저택에서는 동쪽 창에 두꺼운 천을 쳤다. 불빛이 밖으로 새지 않자 방 안의 사람들은 비로소 복면을 벗었다.
황실의 내관 하나, 화산 장문 적운검 위청악(魏靑岳), 곤륜 장문 설봉검 마원정(馬元正), 무당 장로 철심도인 오경문(吳敬文), 청성 장로 음학검 당욱(唐旭), 형산세가 원로 정암장 형수백(邢守白)과 사천세가 장로 독수 당유백(唐裕白)가 둥근 탁자를 둘러쌌다. 탁자에는 전황을 그린 지도와 군량을 징발한 고을의 명부가 놓여 있었다.
“황제께서는 반란을 진압하라 하셨소.” 내관이 말했다. “그 명은 거짓이 아니오.”
위청악이 지도의 길목을 손가락으로 눌렀다. “그런데 왜 우리 사람은 가장 험한 길로 보내고, 저쪽 문파는 관군의 뒤에 세우는 거요?”
“험한 길을 먼저 뚫은 이름이 승전 장계의 맨 앞에 적힐 테니까.”
마원정이 낮게 웃었다. 오경문과 당욱은 웃지 않았다. 문파마다 바라는 것은 달랐다. 관군과 나란히 서는 명예, 무림의 분쟁을 판정할 권한, 오래된 경쟁 문파가 잃게 될 제자와 세력. 그들은 같은 문서에 손을 얹으면서도 서로의 손등을 살폈다.
형수백이 명부를 넘겼다. 당유백은 그가 말하는 동안 토지를 약속한 도장 자국을 살폈다. “우리 집안은 언제까지 십대 문파의 결정만 따라야 하오? 토벌에는 우리 자제들이 먼저 피를 흘리고 있소.”
“전쟁이 끝나면 자리를 다시 정하겠소.” 내관은 대답했다. “문파보다 많은 땅과 사람을 쥔 집안이 낮은 자리에 앉을 까닭은 없지.”
그 말에 네 사람의 얼굴이 동시에 굳었다. 내관은 모르는 체 찻잔을 내려놓았다. 서로가 서로를 의심하는 동안에는 모두 그에게 돌아올 터였다.
“북쪽 산골에서 군량을 거둬 갔다 들었소.” 당유백이 말했다. “백성의 원망이 클 텐데. 누가 그 원망을 떠안을 거요?”
“원망은 기록하지 않소. 반란군을 막아 주었다는 말만 남기면 되지.” 내관이 지도의 마을 하나를 접어 가렸다. “다만 그곳에 피 흘리며 들어간 낯선 사내가 있소. 먼저 찾으시오. 살아 있는 편이 좋겠소.”
“누구이기에?”
내관은 잠시 망설였다. “서른 해 전 지워진 장부에 이름이 남은 집안의 사람.”
방 안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오경문이 처음으로 고개를 들었다. “그때 끝났다고 하지 않았소?”
“끝났어야 했지.”
내관이 돌아간 뒤에도 동쪽 창의 천은 걷히지 않았다. 그가 앉았던 자리에는 빈 찻잔과 함께 얇은 종이 한 장이 남아 있었다. 문파와 세가의 서명이 적힌 문서가 아니었다. 토벌대의 예상 손실과, 살아남은 세력이 이후 서로를 견제하게 할 순서가 적혀 있었다.
내관은 저택 밖에서 그 종이를 기다리던 사람에게 고개를 숙였다. 그 사람은 황실의 옷도, 강호의 옷도 입지 않았다.
“네 문파와 두 세가는?”
“제각기 이익을 얻었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대로 두어라.”
“황실의 이름이 드러나면 어찌합니까?”
어둠 속의 사람이 대답했다. “왕조의 이름은 바뀐다. 다음 이름이 필요해지면 그때도 문을 열어 줄 사람이 있어야지.”
“어느 왕조에서 처음 그 장부를 썼습니까?” 내관이 물었다. 어둠 속의 사람은 대답 대신 낡은 봉투 세 장을 꺼냈다. 첫 봉투는 지금 황실의 종이가 아니었다. 뒤의 둘에는 각기 다른 서체로 같은 산길의 샘과 오래된 창고가 표시돼 있었다. 명이 선 뒤 지명을 바꾸어도, 그곳을 지나는 물과 길은 그대로였다.
“당신은 그때 살아 있지도 않았을 텐데.” 내관의 말에 그 사람이 웃었다. “나도 물려받았지. 열쇠와 빚, 사람을 찾는 법을.” 그는 어느 집안의 이름을 말하지 않았다. 바깥 뜰에는 말 두 필만 있었지만 창고를 열 사람은 도성과 변방의 역참에 따로 있었다. 한 사람이 사라져도 다음 사람이 약속한 값을 받고 문을 열었다.
내관은 앞서 자신이 건넨 문파 명단을 다시 보았다. 이름 옆의 붉은 표시는 자신이 한 것과 같았다. 다만 그 아래에 더 오래된 먹으로 적힌 표시가 있었다. 그는 누구의 손이 먼저 지나갔는지 묻지 않았다. 오늘 자신이 선택한 것으로 믿고 있던 길에 이미 누군가 발자국을 남겼다.
내관은 더 묻지 않았다. 그는 이들이 앞세우는 황제조차 세상을 움직이는 손의 전부가 아님을 알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