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도겸(尹道謙)은 병사들 앞에서 왕조의 이름을 외치지 않았다. 예전에 고을의 곡식 장부를 맡았던 그는, 굶는 집의 이름을 지우라는 상관의 명을 거부하고 옥에 갔다. 탈옥해 모은 첫 사람들은 무사가 아니라 밭을 빼앗긴 농민이었다. “씨를 뿌린 사람이 수확을 먹고, 군량은 마을 대표 앞에서 셈한다. 포로가 된 농민에게도 돌아갈 길을 묻는다.” 그의 말을 듣고 합류한 사람들이 삼베 깃발을 들었다. 그러므로 그 말이 어긋나는 날, 그가 먼저 설명해야 했다.
장막 안에는 새로 헤아린 병력이 적혀 있었다. 팔천사백 명. 그러나 병사가 싸울 준비를 마친 수와 다음 보름 먹일 수는 다른 숫자였다. 윤도겸이 손을 뻗자 총대장 곡철위(谷鐵威)가 장부를 눌렀다. 철산장이라 불리는 그는 한때 원의 변경 군영을 지킨 장수였다. 맨손으로 창대를 꺾는다는 소문이 났지만, 그가 사람들을 두렵게 하는 까닭은 쓸데없이 돌격하지 않는 데 있었다. 한 걸음 뒤로 빼서 열 명을 살릴 수 있으면, 눈앞의 명예를 버렸다.
조금 전 마당에서 그는 기병 셋에게 동시에 창을 내밀게 했다. 첫 창을 팔뚝으로 받지 않고 창대 옆면을 따라 손을 미끄러뜨려 끝을 비켜 냈고, 두 번째 창수가 발을 디딜 땅을 발끝으로 파 무너뜨렸다. 세 번째가 빈틈을 찾을 때는 이미 그의 창끝이 말고삐 위에 멎어 있었다. 병사들은 손이 빠르다는 말보다 그가 언제 물러날지 먼저 보았다는 사실을 더 오래 이야기했다.
“다음 싸움에서는 내 군령 아래 다섯 부대가 움직인다.” 곡철위는 지도에 돌을 놓았다. “보르테무르의 푸른기병 이천사백이 적의 측면을 흔든다. 노진백의 하구수군 이천은 물길과 도하점을 맡는다. 하문량의 옛 한군 창대 천이백이 좁은 길을 막는다. 곽지평의 토민군 천팔백은 마을과 군량 길을 지킨다. 나머지 천은 정찰·전령·의원·예비대다.”
“토민군에서 기병에게 말을 먹일 곡식을 빼앗아 가면 명령을 거부하겠소.” 곽지평이 말했다. 곡철위는 돌 하나를 빼서 그 앞에 놓았다. “빼앗은 놈의 이름을 가져와라. 내 군령에도 마을 약탈은 없다.” 보르테무르는 작게 코웃음을 쳤지만 반대하지 않았다. 자신의 병사도 물을 얻을 마을이 필요했다.
막사 입구에서 화산을 떠난 검객 서금우(徐錦佑)가 칼집을 허리에서 풀었다. 문파 안에서 관군을 돕자는 결정에 반발해 나온 그와 열세 사람은 강호인 모두를 대표하지 않았다. “우리 검수는 농민 군영에 섞이지 않겠다. 도하하는 사람을 빼내는 길에 서겠다.” 그 곁에서 혈월사 연자희가 보폭과 그림자를 재며 말했다. “내 무리는 밤길을 살피고, 섭구의 사파 검수들은 보급로를 끊는 적을 막는다. 군령은 받되 아이를 미끼로 쓰라는 명령은 받지 않겠다.” 강호에서 서로 원수로 부르던 사람들이 한 장막 안에 서 있었다.
윤도겸이 군량 표를 다시 펼쳤다. “우리가 내일 관군을 이겨도 마을에서 곡식을 빼앗으면, 백성은 다른 깃발 밑에서 다시 우리와 싸울 것이다.” 곡철위가 그를 바라보았다. “그래서 그 말을 네가 계속해야 한다. 내가 창으로는 막지 못하는 싸움이니까.”
한편 아우의 마을에서 떠난 사내는 물가에 앉아 오래된 옥패의 빠진 모서리와 같은 모양의 흉터를 손가락으로 더듬었다. 그의 이름은 보르지긴 알탄(孛兒只斤·阿勒坦)이었다. 가문에는 칭기즈 칸(成吉思汗)의 아들 툴루이(拖雷)가 신임했던 방계 왕족 사르카(薩爾喀)의 이야기가 전해 내려왔다. 알탄은 그 혈맥의 후손이었다. 뒤에 그의 형제들은 왕위의 가능성조차 위협이라 여겨 알탄의 아버지에게 역모를 씌웠다. 처형된 가족과 도망길에 죽은 시종들의 얼굴이 알탄을 전장 밖으로 밀어냈다. 이 가문의 계보와 음모는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진 소설 속 이야기였다.
보르테무르의 전령이 그를 찾아냈을 때 알탄은 칼을 뽑지 않았다. “옛 황실의 피를 앞세우면 흩어진 병사들이 모입니다. 칭기즈 칸의 이름을 기억하는 자들이 기다립니다.” 전령은 무릎을 꿇었다.
“그 이름으로 또 어느 집의 아이가 군량 수레를 끌게 되지?” 알탄은 물었다. “내 형제들은 피를 지키겠다며 우리 집부터 무너뜨렸다. 왕좌에 앉으라고 나를 찾아왔다면 빈손으로 돌아가라. 다친 사람을 옮길 길을 묻는다면 다시 오고.”
전령은 한참 뒤에야 일어났다. 알탄이 등을 돌리자 전령은 물가 건너편에서 짐을 진 소년 하나를 보았다. 멀어서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자신들이 내세우려는 왕족과 관군의 이름으로 끌려온 소년이 같은 강을 사이에 두고 있다는 사실을, 그날 두 사람 모두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