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권 · 2 · 초고

남겨 둔 자리

아우는 전장에서 돌아오지 못한 사람들의 물건을 전하고, 마을의 일상을 다시 배운다.

아우는 다음 날 아침 대산의 집 앞에 섰다. 공방의 문은 반쯤 열려 있었다. 창대에 쇠테를 두르던 작은 모루가 안쪽에 보였다. 대산의 아내는 그가 꾸러미를 들고 온 것을 보고 의자를 내어 주었다. 앉으라고 했지만 자신은 서 있었다.

아우는 천을 풀어 작은 망치와 손잡이가 닳은 칼을 꺼냈다. 전장에서 대산이 수레를 고칠 때마다 품고 다니던 물건이었다. “마지막에 어린 병사 둘을 길 밖으로 밀어냈습니다. 저한테는 그 아이들을 데리고 가라고 했어요.” 그가 덧붙이려던 ‘제가 돌아왔을 때는’이라는 말은 목에서 걸렸다. 아내가 물었다. “그이는 많이 아팠나요?” 아우는 거짓말을 할 수 없어 잠시 숨을 골랐다. “그럴 시간이 길지는 않았습니다.”

대산의 아내는 망치를 쥐었다. “왜 남을 먼저 살리겠다고 했을까요.” 아우는 답을 알지 못했다. “그 사람이 그랬어요”라고 말하면 대산이 없는 자리에 그의 성격을 방패로 세우는 것 같았다. 아내는 망치를 내려놓고 공방의 화덕을 보았다. “나한테는 다시 오겠다고 했는데.” 그녀는 아우를 쫓아내지 않았다. 그를 용서하겠다고도 하지 않았다. 아우가 일어날 때 문가의 갈라진 나무 손잡이를 가리켰다. “그걸 좀 깎아 줄래요? 내가 하려면 자꾸 삐뚤어져서.” 아우는 칼을 빌려 앉았다. 두 사람은 한동안 나무 깎는 소리만 들었다.

손잡이를 깎는 동안 대산의 아내는 아우를 한 번도 쳐다보지 않다가 물었다. “당신은 살았는데 그이는 못 살았네요.” 아우는 손에 든 칼을 내려놓았다. 아내는 뒤늦게 “당신 잘못이라는 말은 아니에요”라고 했다. 그러나 미안하다 말한 것도 아니었다. 아우는 “압니다”라고 했다가, 자신이 무엇을 안다고 대답했는지 몰라 입을 다물었다. 문밖에서 아우의 어머니가 가져온 마른 나물을 놓고 돌아섰다. 대산의 아내는 한참 뒤 그 소쿠리를 들여놓았다.

마칠의 집에서는 곡식을 찧는 방아가 돌아가고 있었다. 그의 어머니가 묶어 준 손목 실은 여러 번 젖었다 마르며 색이 바랬다. 아우가 실을 내밀자 여인은 “내가 그걸 묶어 줬지” 하고 받아 들었다. 마칠이 어린 짐꾼을 구하다 죽었다는 말을 듣고 “그 애가 그랬겠다”고 말했다. 다음 말은 나오지 않았다. 방아에 넣어 둔 곡식을 그대로 두면 눅눅해질 것이었다. 그녀는 실을 손목에 감고 절구를 한 번 더 움직였다. 아우는 같이 방아를 찧어도 되냐고 물었다. 여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몇 집은 전사자에게 지급한다던 곡식을 아직 받지 못했다. 장부에는 수령한 것으로 적혀 있어 촌장이 관아에 두 번 다녀왔다. 이번에는 글을 아는 석두가 숫자를 베꼈다. 한 손으로 쓰느라 시간이 걸리자 어떤 이는 빨리 끝내 달라고 화를 냈고, 곧 석두의 빈 소매를 보고 시선을 내렸다. 석두는 “천천히 써도 틀리지는 않게 할게요”라고 말했다. 그 집의 여인은 화난 까닭이 석두 때문이 아님을 알았지만, 이미 뱉은 말은 주워 담을 수 없었다. 다음 날 그는 석두에게 종이 한 장을 더 가져다주었다.

마을 사람들은 예전보다 더 자주 서로를 서운하게 했다. 내 집의 약을 남의 집에 나누는 날도 있었고, 저 집에는 돌아온 아들이 있는데 우리 집엔 없다는 생각을 물리지 못하는 날도 있었다. 한겨울 한 사람이 쓰러지면 두 집이 번갈아 아궁이에 불을 넣었다. 손을 빌려주는 일이 원망을 없애지는 못했지만, 원망이 그 손을 완전히 거두게 하지도 못했다.

그날 오후 우물가에서 석두가 새 두레박 줄을 한 손으로 잡아당기다 물을 반쯤 쏟았다. 곁의 여인이 그를 도우려 나섰다가, 석두가 먼저 “제가 묶을 수 있어요. 매듭만 좀 잡아 주세요”라고 했다. 여인은 줄 끝만 붙들어 주었다. 소호는 석두가 오랜만에 남에게 명령하는 꼴이라며 웃었고, 석두는 “네가 들통을 나르면 명령은 안 하지”라고 답했다. 웃음은 우물가에 잠깐 머물렀다. 소호도 석두의 빈 소매를 보고 말을 고르는 밤이 있었다.

아우의 어머니는 이웃의 병든 노인에게 죽을 가져다주고 돌아왔다. 전쟁이 길어지던 겨울에 곡식이 모자랐던 집이었다. 노인은 지금도 찬 날이면 기침을 멈추지 못했다. 다른 집에서도 오래 굶었던 아이가 자주 배탈을 앓았다. 아무도 ‘전쟁이 끝났으니 이제 괜찮다’고 말하지 않았다. 한 집에서 약초를 구하면 조금씩 나누고, 일손이 비는 날에는 남의 지붕을 먼저 고쳤다. 부탁한 사람이 나중에 갚을 수 있을지는 묻지 않았다.

어머니도 아침 일을 마치면 한동안 문지방에 앉아 숨을 골랐다. 아우가 물으면 “나이가 들면 다 그렇지”라고 했다. 그는 그 말을 믿고 싶어서 더 묻지 않았다. 대신 물동이를 먼저 들고 장작을 작은 크기로 쪼갰다. 어머니는 아들이 집안을 군영처럼 정리한다고 놀렸다. “짚신도 줄 맞춰 놓겠네.” 아우가 “몇 켤레나 된다고요” 하고 받아치자 어머니가 웃었다. 두 사람은 그 웃음을 오래 들을 수 있을 줄 알았다.

마을 밖 돌터에는 진노야가 쓰던 평평한 돌이 남아 있었다. 아우는 처음부터 세 걸음을 되풀이했다. 창 없이 두 팔을 내려놓고, 몸을 비틀지 않은 채 돌까지 간다. 첫발을 물러서며 살았던 전장이 자꾸 떠올라서 그는 그 발만 수백 번 연습했다. 둘째 발은 습관처럼 따라왔다. 돌 앞에서 오래 서 있어도 무엇이 잘못됐는지는 보이지 않았다.

진노야가 떠나기 전 돌 밑에 끼워 둔 얇은 나무쪽이 있었다. 비에 젖어 글자는 거의 번졌고, 끝에 적힌 한 줄만 남았다. ‘남은 발을 첫발 뒤로 끌고 오지 마라.’ 아우는 따라 해 보다가 넘어졌다. 남은 발을 딴 데 놓으면 몸이 흩어지는 것 같았다. 그는 쪽지를 품에 넣고 여전히 익숙한 대로 걸었다. 어느 날에는 발을 덜 떨었고, 어느 날에는 아무것도 나아지지 않았다.

노인이 가르치려던 게 무엇인지는 몰랐다. 아우는 강가 흙둑에서 백리혁과 곡철위의 발이 서로의 길을 먼저 차지하던 순간을 잠깐 떠올렸다. 그들은 발을 따라다니지 않았던가. 생각이 거기까지 이르자마자 기억 속의 움직임이 흐려졌다. 내일도 해 보면 조금은 알 수 있을까. 그 생각만은 남았다.

집에 돌아가니 어머니가 보리밥을 남겨 놓았다. 아우는 나무쪽을 식탁에 올려두지 않았다. 오늘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읽지 못하는 한 줄을 이기는 게 아니라, 어머니와 밥을 먹고 내일 대산의 공방 손잡이를 마저 고치는 것이었다. 그는 손을 씻고 어머니 맞은편에 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