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권 · 9 · 초고

전쟁의 바람

양양의 성문 앞에서, 끝난 줄 알았던 전쟁의 냄새가 다시 난다.

남양에서 양양으로 내려가는 길은 소림의 돌계단보다 평탄했으나 수레는 자주 멈췄다. 북쪽으로 향하는 말과 창, 남쪽에서 올라오는 군량이 같은 역로를 썼다. 낡은 갑옷을 고쳐 입은 군사들이 지나가고 나면 거리의 사람들은 다시 제 일을 했다. 전쟁은 시작되지 않았다. 그래도 누군가 길을 비워 두고 있었다.

양양의 성문 앞에서 강이준은 행렬을 세웠다. 문루 아래에는 북방의 말먹이를 급히 마련하라는 명이 붙어 있었다. 성 안쪽 관고에서는 부대마다 곡식의 재고를 다시 세고 있었다. 북원에서 어느 무리가 움직였다는 소문은 하루 사이에 세 가지 이름으로 바뀌었다. 어느 역참도 싸움이 났다는 장계를 보지 못했지만, 관리들의 손은 이미 싸움이 난 것처럼 빨라졌다.

호송대의 곡식 수레 앞에도 관리가 왔다. 그는 북방 방비 물자를 우선하라는 새 공문을 내밀었다. 그 아래에는 유족과 부상자가 보상을 받았음을 증명할 수령증이 미리 묶여 있었다. 이름과 수량은 적혔는데 손도장은 비어 있었다. “일단 관고로 옮기고, 나중에 수령인을 불러 찍으면 됩니다.” 관리의 말은 자연스러웠다. 소호는 수레 앞에 서서 종이의 빈칸을 보았다.

강이준은 공문의 관인을 살폈다. 진짜인 듯했고, 날짜도 맞았다. 그가 명을 거슬러 수레를 돌리면 호송대 전원이 죄를 물을 수 있었다. 서명만 하면 보상 물자가 군량 창고로 들어가고, 수령증의 빈칸은 언젠가 누군가의 손도장으로 채워질 것이었다. 제갈세가에서 이의를 적어 둔 장부와 소림의 청원서가 문서함 안에서 함께 흔들렸다.

아우는 어린 날 마을에 온 징발 문서를 떠올렸다. 종이 한 장이 닿은 다음 날 사람의 발길이 달라졌다. 자신도 집을 떠났었다. 그는 공문을 빼앗지 않고 강이준에게 낮게 말했다. “창고로 옮기는 명과 받았다는 증명은 다른 일입니다.” 석두가 명부를 펼쳐 아직 방문하지 못한 마을의 이름을 손가락으로 짚었다. “이 사람들은 여기 있지도 않습니다.”

관리의 뒤에서 군졸들이 한 걸음 다가왔다. 제갈세가 뜰에서와 달리 아우는 검 손잡이에 손을 얹지 않았다. 강이준이 긴 침묵 끝에 말했다. “군량 창고로 넘기라는 명을 접수하겠소. 다만 내 호송 장부에는 이 물자가 유족에게 지급되지 않았다고 적겠소. 임시 보관증과 수레마다 봉인한 수량을 내놓으시오. 받았다는 증명에 남의 손을 찍으라 하지 마시오.” 관리가 눈썹을 찌푸렸다. 당장 반역을 저지르는 사람처럼 몰아붙일 수는 없었다.

창고 앞에서 해가 기울도록 수량을 다시 셌다. 곽삼복은 바퀴마다 끼워 둔 쐐기를 빼지 않았고, 소호는 곡식 자루에 새 봉인을 달았다. 석두가 임시 보관이라는 네 글자 아래 빈 수령란을 하나씩 그어 두었다. 결국 관고는 원래 봉인을 보존한 채 일부 수레를 따로 두고, 호송대가 나머지 물자와 문서함을 가지고 길을 잇도록 했다. 누구의 명이 우선인지는 상급 관아의 답이 올 때까지 미뤄졌다. 해결이라고 부르기에는 아직 창고 문이 닫혀 있었다.

저녁에 소호가 강이준에게 물었다. “다음 명이 또 오면 어떻게 합니까?” “그때도 받은 사람의 이름을 먼저 확인한다.” 강이준은 그렇게 말하고도 오래 공문을 들여다봤다. 그에게도 명령은 먹과 관인만의 일이 아니었다. 한 번 모아들인 사람들을 다시 흩뜨리는 데 얼마나 오래 걸리는지, 그는 전장에서 보았다.

성벽 위에서 북을 시험 삼아 울렸다. 아우는 소리에 먼저 몸을 낮췄다가 주위에 아무도 그러지 않는 것을 보고 곧게 섰다. 전쟁이 끝난 뒤 몇 해를 어머니와 살았다. 아침마다 물을 긷고 겨울마다 장작을 쌓았는데, 몸은 그 소리를 아직 잊지 못했다. 성 아래에서는 장사꾼이 문을 닫았고 아이들이 서로를 쫓아 뛰었다. 저 아이들이 내일도 저렇게 뛸 수 있을까. 아우는 그 생각을 말하지 않았다.

석두가 문서함을 잠그며 말했다. “북쪽이든 남쪽이든 아직 싸움이 났다는 말은 없네.” 아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더 오래 보고 있어야지.” 적을 본 적 없는 관리와 군졸들 사이에서 사람들의 몫이 먼저 움직이는 것을 그는 보았다. 전쟁은 칼이 맞붙는 날에만 시작되는 게 아닐지도 몰랐다.

다음 날 행렬은 한수를 끼고 균주 쪽으로 나뉘었다. 양양 성문에는 임시 보관한 물자의 수량과 아직 지급하지 못한 이름들이 남았다. 아우는 수레가 멀어질 때까지 성벽을 돌아보았다. 바람이 깃발을 한 번 뒤집었다. 글씨가 보이지 않는 쪽으로 돌아간 깃발을 보고도 그는 그것이 그저 바람이라는 말을 쉽게 할 수 없었다.